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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2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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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강릉

동해바다의 여름에 발을 담그다

  • 기사입력 : 2017-08-1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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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전부터 강릉 바다를 가고 싶었다. 강원도 동해는 높은 절벽 아래 깊고 차가운 바다가 있고 적막한 바람이 그려지게 한다. 그러나 여행지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도달해 겪어 보는 일에는 큰 격차가 있다고 비관해 본 적도 있다.

    여름 강원도는 너무 덥겠고 겨울은 또 너무 춥겠지 했다. 별거 아닌 핑계들로 계속 미뤄둔 강릉을 4년 전 여름 둘째 누나의 손에 이끌려 다녀왔다. 강릉으로 가는 수단은 기차를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강릉행 기차가 중단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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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의 안목해변. 해변을 찾은 사람들이 쉼을 만끽하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대비해 강릉역으로 KTX가 들어올 수 있게끔 2017년 말까지 공사 중이라고 한다. 좋은 마음을 가지려면 넓은 바다를 보는 일이 제격이라는 생각으로 강릉행 기차에 올랐다. 강릉을 비롯해 강원도를 드나드는 기차는 수평선을 지난다. 나는 산이나 해안이 움직이는 바깥 풍경에 넋 놓고 빠져있는 시간을 즐긴다. 여행 중 마주한 풍경은 내가 가진 생각을 자세히 비춰준다. 창문을 가진 교통수단에서 외부를 감상할 때, 사색을 방해하는 잡념들이 풍경을 따라 달아난다고 믿는다. 붕 떠오르는 생각은 데려가고 묵묵히 가라앉은 생각이 나에게 온다.

    그래서 우리는 기차 창가에 앉아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끄집어내 말을 걸어볼 수 있게 된다. 기차의 속도는 사물을 분간해낼 정도만큼의 여유를 남긴다. 휑한 고속도로만 보여주지 않고 자동차로 찾지 못할 시골길을 가고 끊임없이 다른 장면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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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를 타고 우리는 강릉으로 도착하자마자 더운 몸을 끌고 안목해변으로 뛰었다. 한 두여 시간 물놀이 후, 식사 대신 작은 수박을 한 통 잡았다. 바닷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곧바로 수박을 쪼개 퍼먹었다. 여름과일 중 특히 수박을 좋아하는데, 탄산음료를 적당히 부어 톡톡 튀는 단맛을 더해 화채로 만들어 먹으면 그럴듯한 식사가 되기도 한다. 화채는 수박껍질이 곧 그릇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참 쓰임이 많은 과일이 된다. 새빨간 속살을 열심히 씨를 발라가며 한 통을 다 비우고 나면 뿌듯한 마음까지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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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목해변에 놀러온 사람들.



    옷을 갈아입고 강릉의 명소 커피거리로 향했다. 그중 가장 눈에 익은 테라로사 카페를 찾았다. 나는 커피 맛보다는 마시는 시간에 더 중점을 두는 편이다. 커피 한잔하자는 말에는 커피 맛을 떠나 잠시 숨통을 좀 트자거나 시간을 내어 담소를 나누자는 뜻이 깊숙하게 뿌리내려 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식사의 종류를 고르고 괜찮은 식당을 고르고, 앉아 다시 메뉴를 선정하고 맛이 있나 없나를 판가름한다. 끼니를 해결하는 데에도 성과를 바라며 요구되는 복잡한 선택이 많다. 이런 선택에서 벗어나 단지 커피나 차를 마시자는 말에 담긴 쉼의 의미를 좋아한다. 커피를 주문한 누나와 달리 나는 테라로사에서 허브차를 마셨다. 커피처럼 뚜렷한 향을 많이 가진 음료도 좋았지만, 그날은 여름답지 않게 춥고 흐려서 은은한 향을 가볍게 놓아주는 차가 끌렸다. 우리는 음료를 테이크아웃해 경포해변을 맨발로 걸으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걷는 동안 허브차는 딸깍하는 소리에 갇혀 살짝 살짝 향을 내어 코를 건드렸다. 그다지 성과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과포화된 상황을 모면해주는 티 타임. 사람과 풍경이 넘치는 테라로사가 아닌 어디라도 차 마시는 시간은 그 나름으로 여행의 역할을 한다.

    그 당시 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누나는 나이를 먹을 수록 대단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그냥 세파에 닳아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나이 먹는 것은 밥을 먹어 그릇을 비우는 일처럼 나이를 차츰차츰 먹어 없애고, 나이에 맞게 요구하는 일들도 없애 자신이 원하는 일만 골라 담을 수 있게 비워내는 일이라 생각해보자는 말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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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에 발을 담근 모습.



    그리고 어두워진 바닷길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해안을 걷는 내내 우리 화두는 새로운 것과 변화였다. 새롭다는 것은 변화를 느끼는 것이고 변화를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은 그것에 가장 익숙한 사람이 아닐까. 지역 사람들만이 여행자를 구분할 수 있는 사실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잘 알아야만 그 사람의 변화를 알아채 줄 수 있으니깐, 그래서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면 변화는 따라오지 않을까라고 이야기를 맺고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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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 중인 대관령의 양떼.



    다음 날은 대관령을 찾았다. 강릉 양떼목장은 풀을 뜯는 양들을 울타리 하나를 두고 만날 볼 수 있다. 양은 시력이 아주 약하고 방향감각도 거의 없다. 그래서 양에게 무리를 이탈해보는 행동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타고난 길치라 눈앞에 움직이는 사물을 무작정 따라가는 양들은 선두가 정한 길을 따라 의심 없이 걷는다. 양들의 운명공동체를 책임지고 무리의 첫발을 내디뎌야 하는 첫 번째 양은 그나마 길눈이 밝은 양일까 생각했다. 선택했으면 어쨌든 믿고 따라 가보는 것이 양들도 사람 사는 사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리 또는 여러 마리 양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sheep’ 하나여서 양들은 떼 짓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서 양목장이 아닌 양떼목장이라 이름 지었을까 이야기하며 내려왔다.

    강릉에서 돌아오는 길 역시 기차를 탔다. 바퀴와 철로가 덜컹덜컹 맞물리며 굴러가는 기차는 적당히 불안한 감각을 준다. 검은 거울로 변한 밤 차창에 비친 얼굴을 본다. 생활에 묶여 내가 나 아닌 누군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마음을 확인해 보았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 여행은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지만 그 자체로 보상이라고. 여행은 약속한 공식이나 주어진 양식이 없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계획만으로 이미 여행에 발을 담그는 것이다. 이번 강릉 여행에서는 기찻길이 목적지로 향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감당했다. 열차는 그어둔 밑줄을 따라 들어와 나간다. 기대하던 강릉으로 들어온 기찻길을 그대로 돌아나가면서 얼레를 감듯 여정을 복기해 본다. 그렇게 지난 여행의 의미를 한층 더 키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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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백
    △ 마산 출생·경남대 재학
    △ 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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