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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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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60여년 전 농사일·생활사 ‘대천일기’로 남긴 윤희수 옹

삶의 역사 평생 기록한 93세 할아버지 “일기 써야 잠 와”
일제강점기 초등 3학년 때 일기 써
6·25 전쟁 이후부터 가장 역할

  • 기사입력 : 2017-08-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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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흔을 넘긴 노인이 60여 년 전부터 써온 일기가 책으로 발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자는 문득 시골에 계시는 노모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의구심과 기대감으로 수소문 끝에 전화를 했다.

    “‘따르릉’, 여보세요. 거기 대천마을 윤희수 선생님 댁이시지예.” “누구세요? 저는 아버지 딸인데요.” 바로 찾았구나. 화명동에서 산성 가는 입구에 마당이 넓은 고즈넉한 2층 단독주택 입구에 노신사가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촉이 왔다. 역시 소문대로 범상치 않은 할아버지였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평소 기자가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 인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인자하신 이웃 할아버지였다. 나이가 93세인데도 자세가 꼿꼿하고 말씨와 듣는 귀는 50대 정도의 신체 나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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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수 옹이 자택에서 평생 동안 일기를 써온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대천일기는 60여 년 전인 1954년부터 1971년까지 농사일을 비롯해 대천마을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가깝고도 먼 근현대사 60년의 기록이다.

    윤 할아버지의 일기는 1954년 7월 28일 시작된다. 1954년 7월 28일 대천마을에는 비가 내렸다. 다음날 비가 개고 흐려서, 여름 논밭에 불쑥불쑥 자란 피를 뽑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비 옴’으로 기록한 첫 일기에 이어 다음 날에는 ‘오후부터 오두락(五斗落) 논에 제초작업을 하였다’라고 썼다. 농사일기인 만큼 하루하루의 날씨를 적고 누구와 무슨 농사일을 했는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쌀과 보리를 수확한 뒤에는 전체 수확고를 매년 기록했다. 농작물을 심은 농지마다 재배한 품종, 수량, 농약의 종류, 날씨 변화까지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또 농사를 함께한 가족, 품앗이한 마을 사람들, 머슴의 새경까지 기록해 한 개인의 농업 활동뿐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1962년 1월 9일 마을 안을 흐르는 시내의 둑이 무너져 반장, 청년들이 밤에 사랑방에 모여 대책회의를 하였다. 며칠 후 농업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마을 반장, 위원 등등이 저녁을 먹은 후 모였다. 30대, 40대 젊은 농사꾼은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마을 반장회의를 개최하였다. 마을 납부금, 비료 배급, 마을 청소, 마을 부역에 이르기까지 마을일을 결정하고 주민에게 전달하는 여러 일을 묵묵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기자는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긴 시간 동안 쓴 것도 놀랍고, 지난 일기장들을 지켜온 것도 그저 경탄할 일이었다. 일기를 쓰지 못한 날에는 어디엔가 메모를 해두었다가 일기장에 옮겨 적은 숨은 성실함도 보인다. 분명 개인의 일기장인데, 대천마을에 같이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이 나타나고 그가 살았던 마을이 드러났다. 때론 일기장엔 마을 밖 소식이 전해져 있고,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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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농사일기

    윤희수 옹은 50대까지 하루도 농사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농부였다. 그는 애써 키운 농산물을 팔기 위해 장이 서는 날이면 부지런히 우차를 몰고 큰 시장인 구포장에 나갔다. 이 우차에는 자기 집 곡식, 남의 집 채소 할 것 없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장에서 돌아올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장에서 사오라고 부탁한 것,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할 것, 마을에 지급되는 구호물자까지 실려 있었다. 도로가 넓어지고 자동차가 흔해지기 전까지 우차는 당시 농가의 상징이며, 마을 공동체의 연결고리였다.

    또한 그는 평생 농사를 짓고, 시간을 쪼개어 마을 일을 도맡아 하는 마을 일꾼이기도 했다. 30~40대 젊은 시절 그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마을회의를 개최했다. 마을 납부금, 비료 배급, 마을 청소, 마을 부역에 이르기까지 마을 일을 결정하고 주민에게 전달하는 여러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잠시 상념에 잠겨 눈시울이 빨개졌다. “내가 이 집에 살고 있는지가 400년이 넘었어. 파평 윤씨 시조 할아버지의 35세 손이다. 병자호란 이후부터 이 집에서 살고 있는데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구포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매일 일기를 써라고 시켰다. 안 쓰면 몽둥이로 맞았어. 그래서 그 선생님 덕분에 지금까지 쓰고 있어. 요즈음은 별로 쓸 게 없어. 그냥 밥먹고 잤다 이 정도야. 내 일기장을 부산대학교에서 책 만든다고 다 가져갔어. 뭔 책을 만든다고 하더구만.”

    윤희수 옹은 그동안 나이만큼이나 삶의 이력이 다양하다. 일제강점기에 구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회사와 일본인 농장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절에 들어가 불화를 배우기도 했다. 1950년 9월 3일 징집을 당해 대구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춘천까지 올라갔다가 부상을 당해 제대했다. 제대 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집안일을 전담하게 되면서 마을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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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부산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윤희수 옹의 ‘대천일기1, 2’.

    이 책을 발간한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교수는 “지금까지 살아온 윤희수 옹의 60년 삶의 기록인 ‘대천일기’를 1, 2부로 역어 출간했다. 분명 개인의 일기인데 대천마을에 같이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소상하게 기록해 마을 변천사 연구는 물론 한국 근현대사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대천일기는 지금도 쓰고 있는 일기다. 일제강점기 때도 일기를 적어 긴 세월 동안 매일 일기를 쓰고 보존해 오는 일이 쉽지 않은데 일기장 보관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대천일기 1부에는 ‘우차를 물고 장에 갔다 왔다’라는 주제로 하루도 농사일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윤희수 옹의 삶과 마을공동체의 모습을 담았고, 2부에서는 ‘마을 반장회의를 개최한다’라는 주제로 농사일과 함께 마을 납부금, 비료 배급, 마을 청소, 마을 부역에 이르기까지 마을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일하는 윤 옹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대천일기는 평생 농사를 짓고, 시간을 쪼개어 집안일, 마을일, 문중일을 도맡아서 한 윤희수의 일기이다.

    윤희수 옹은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다. 매일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일기를 쓴 이후에야 잠자리에 든다. 그의 일기를 통해 농사꾼의 하루가, 마을 지도자의 일상이, 대천마을 공동체가 살아난다.

    우리는 일상의 삶은 역동적인 것인데, 흔히들 농촌의 일상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대한 반성과 함께 일기를 통해 60년 전 오늘을 살아간 사람들의 삶 또한 얼마나 끈끈한 생명력과 꿈틀거림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반성한다.

    또 우리네 평범한 서민 일기장은 ‘참 잘했어요 그리고 별 다섯 개’가 박힌 도장을 받기 위해 그날그날 온갖 에피소드들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썼던 일기장은 나에게 남아 있지도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해도 이사 가던 날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글·사진= 김한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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