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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창원에서 시내버스로 출퇴근하기- 서영훈(부국장대우·사회부장)

  • 기사입력 : 2017-06-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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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즐기던 친구 A가 몇 해 전 영국 런던에 갔다. 패키지여행만 해오던 그는 이번에는 자유여행을 택했다. 항공편이나 호텔이야 인터넷으로 손쉽게 예약을 했다. 교통수단 선택은 그에게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지하철이야 비교적 쉽게 이용할 수 있었지만, 도시 풍광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다. 용기를 낸 A는 런던의 명물인 빨간 2층 버스를 탔다.

    A는 버스가 목적지 가까이 이르자,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채비를 했다. 그 순간 버스가 급하게 정차했다. 버스 운전기사가 놀란듯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A는 당황해 “내리려고 일어섰다”고 했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돌아가서 앉아 있어라. 정류소에 정차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A는 당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고 했다.

    한국 시내버스에 익숙한 A에게 런던 시내버스는 문화적 충격이라 할 만하다. 이리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승객이 자리에 앉아야 출발하고, 정류소에 완전히 정차한 뒤에야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승용차를 버리고 10개월가량 시내버스로 출퇴근하고 있는 나.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최소한의 품위라도 지키고 싶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 여러 노선의 버스가 집중되는 정류소에서는 발이 빨라야 한다. 앞차에 밀려 정류소 한참 뒤에 선 버스를 타려면 종종걸음만으로는 안 된다. 체면이고 뭐고 없이, 냅다 달려야 한다. 좌석에 앉으려는 행위는 절대 아니다. 버스에 오른 뒤에는 몸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교통카드를 인식기에 갖다대자마자 버스는 내달린다. 순간 몸이 휘청거린다. 만약 서서 갈 경우, 버스가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꿀 때는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꼭 잡고 두 다리에 힘을 꾹 줘야 한다. 손에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고 있으면 더욱 힘들어진다. 내릴 때는 손잡이를 번갈아 잡아가며 미리미리 출입구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버스가 정차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지만, 나에게 그렇게 느긋하게 내릴 만한 용기가 없다. 안내문에는 백발에 허리가 굽은 할머니 그림만 있다. 노약자만 그리 하라는 것으로 읽힌다. 시내버스를 타고 내리기까지의 전 과정은 중학교 때 과학선생님이 가르쳐주시던 ‘관성의 법칙’ 실험실 그 자체다.

    국내에도 런던 시민처럼 느긋한 분위기 속에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도시가 있긴 하다. 비록 비수익노선에 한정하긴 했지만,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공영제를 통해 런던과 같은 수준급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돈이 문제다. 준공영제의 런던, 공영제의 뉴욕처럼 시내버스를 편안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시 재정 지원이 필수다. 그러나 필요한 곳에 쓰라고 거두는 것이 세금이고, 그 세금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것이 재정 운용의 기본이다.

    엊그제 창원시가 시내버스 과속·난폭운전 원인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운행시간 개선 연구용역을 시작했다. 시내버스 운행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을 위한 것이 아닌, 운행시간 개선을 통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려는 작업이어서 다소 아쉽다. 그나마 시내버스 문제를 심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일단 일을 벌였으니, 운행시간 조정과 함께 현재의 시내버스 운행체계에 대한 보다 혁신적인 대안도 찾아보길 희망한다.

    서영훈 (부국장대우·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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