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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일본인의 ‘닫힌 자연관’- 이현우(시인)

  • 기사입력 : 2017-06-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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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수목분경(樹木盆景)’의 기원을 당나라 초기로 본다. 이후 송나라 때 고려에 들어와 ‘분재(盆栽)’라는 이름을 얻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본사이(ぼんさい)’가 됐다.

    현재 중국에는 도시 곳곳에 분경공원이 있으며 정부의 적극적 지원으로 기술 개발과 함께 많은 양의 분경을 생산하여 세계 각지에 수출을 늘리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 또한 본사이마을을 조성하여 국풍전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고 세계본사이연맹을 결성하는 등 본사이의 보급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분재는 규모나 기술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깊은 밤, 집 안에서 고즈넉이 분경을 완상하다 보면 자신도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여유를 잃은 현대인들이 한정된 공간 속에서나마 유유자적하며 벗하기에는 그저 그만인 셈이다. ‘인간 정신의 심미적 활동을 바탕으로 자연경관을 표현한 것’이라고 옹호한 어느 분경애호가의 말처럼, 겉만 가지고 얘기하면 분경은 분명 예술적 조형물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자르고 비틀고 철사로 칭칭 감는 작업에선 잔인함마저 느껴진다. 자연을 대하는 모든 과정이 참으로 비자연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분경에는 자연이 선사하는 변화무쌍하면서도 한결같은 ‘평화와 자유의 교향악’이 들리지 않는다. 인간의 탐욕 속에 다른 생물을 끌어들여 제아무리 멋을 내도 그 모든 것이 잠시 동안의 환상일 뿐이다.

    분경이 한국도 중국도 아닌 유독 일본에서 ‘본사이’로 꽃을 피운 까닭은 그네들의 국민성이 그 바탕에 있지 않나 싶다. 이는 인위와 모방으로 사물을 축소해 제 손안의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유별난 성향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분경 이야기를 정원 쪽으로 옮겨보면 일본인의 닫힌 자연관이 더욱더 확연해진다. ‘객을 맞이하는 낙엽 진 차실의 앞마당을 말끔하게 비로 쓴 다음, 나무를 흔들어서 낙엽을 떨어뜨렸다’는 일본 고사가 있다. 뭐든지 있는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꾸며야만 하는 일본인의 자연관은 이 고사에 기초한다. 얼마나 인위적이고 폐쇄적인가. 한마디로, 일본의 정원은 자연을 재단해 인간의 바람 속에 상징적으로 배치한 ‘허구의 정원’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정원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기초로 한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레, 지형과 지물을 그대로 살려, 꽃을 심어 좋으면 꽃을 심고 나무를 심어 좋으면 나무를 심고, 연못 하나를 파도 수생식물 하나를 심어도 자연 미인을 대하듯 했지 일본처럼 칼로써 지나치게 성형수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원은 자연과 인간의 삶이 하나가 되는 ‘공존의 정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최고의 정원이 있는 아다치 미술관과 조선 최고의 원림(園林)인 소쇄원에 가서 보면 더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오늘도 일본인들은 자연을 축소하여 제 것으로 삼기 위해 열심히 본사이를 다듬고 정원을 가꾸기에 바쁘다. 비록 가짜 보석 반지일망정 손에 끼면 더 예뻐 보일 거라는 ‘착각의 미학’으로 인해 ‘잔인한 탐욕’이 문화의 옷을 입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일본인의 닫힌 자연관 속에 있는 자연은 순환하는 자연이 아니라 사시사철 피어 있어도 향기가 없는 한낱 가화(假花)일 뿐이다.

    이현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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