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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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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

  • 기사입력 : 2017-05-2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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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필용 作 ‘경계’


    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 있어
    부정할 수 있기에 고정되지 않아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

    대립된 두 면을 동시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 진보적 삶 구현 못해

    한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고
    경계에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쪽을 택하면 이념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가 있다.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동작이지만, 사실 이는 매우 긍정적이며 생산적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며 확장하려 애쓰도록 태어났는데, 서로 확장하려 하다가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확장은 다양한 의미에서 기존의 터전에 고착되지 않고 벗어나려는 율동이다. 이것이 이탈이다. 어쩔 수 없이 이탈은 부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반합의 ‘반’이다. ‘합’을 기약하는 ‘반’, 그래서 또 인간은 이탈을 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한다. 생산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지루함을 이기려고 그것을 부정한다. 부정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은 얼마나 공격적이며 생산적인가. 부정할 수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부정이 어느 순간에는 또 멈추어 고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의 죽음이다. 싫증난 한쪽을 부정한 후에 채택한 새로운 한쪽이라고 해서 계속 새롭거나 영원한 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부정이 기약될 때만 새롭고 선하다. 부정의 동력이 끊기고,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으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는 매우 미묘한 원칙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중 부정이나 지속 부정을 말했다. 바로 양공(兩空)이니 중현(重玄)이니 하는 것들이다. 장자는 양행(兩行)을 말한다.

    시인 이갑수는 이렇게 적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신은 망했다.”(<신은 망했다> 민음사) 사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중심 자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인간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이거나 완성이거나 원본이거나 모델이거나 초청된 감독자다. 인간 확장의 절정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회를 건설하면서 확장에 가속도를 냈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모두 도회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도회적 확장의 절정은 신이 만든 시골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도회의 시골화는 이상적인 차원에서 완성된 모습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의 확장은 시골의 도회화다. 그래서 우리는 도회에 있으면서 시골을 갈망한다. 시골을 갈망하는 농도가 짙어질수록 도회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도회에 대한 비판이 격렬해질수록 그는 신적인 영역에 가까워지는 환상을 차지한다. 도회를 공격할수록 진실하고, 신을 닮은 참된 인간으로 치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도회를 떠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도회를 동경하는 것도 도회에서 도회를 비판하는 강도만큼이나 인정을 받아야 공평하다. ‘신은 망했다’는 이갑수의 말이 시골을 택하고 도회를 버리라는 웅변은 아닐 것이다. 신이 망하면서 인간의 승리를 몰래 감추듯이 말해준다. 그런데, 도회의 승리가 시골을 품어야 진정한 완성이 되듯이, 인간의 승리도 신의 승리를 품을 수 있다. 도회에 살면서 배타적 자세로 도회를 부정하고 시골을 갈망하는 것으로는 아무리 격렬해도 성숙한 완성의 길이 아니다. 시골과 도회가 상호 교차되거나 포섭되는 길만이 인간적인 완성에 가깝다. 이것도 사실은 부정이 부정으로 고착되지 않고, 스스로 부정되어 다시 새로워지는 한 형태다. 이것이 진정한 완성이다.

    스스로를 생태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어느 분의 인터뷰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마당에 난 민들레의 꽃대를 꺾어 피리 만드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면서도 난생처음 민들레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민들레 피리를 불 때, 나는 잠시 잊었던 시골의 정서를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그는 매우 절실하고 진실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생태주의의 철저한 복원을 꿈꿨다. 시골을 건설해놓고 망한 신을 살려내려는 전사 같았다. 당신이 사용은 하지만, 사실은 냉장고도 부정한다고 했다. 강남에 살지만, 사실은 많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부정한다고도 했다. 인터뷰 중간쯤에서 나는 지식의 생산이나 창의력이 탐험이나 모험과 깊게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양에는 직업으로서의 탐험가가 먼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동양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분은 탐험이 오히려 삶의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강조한다. 탐험을 통해서 대륙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 교류가 세상의 생태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지식의 생산이나 생산된 그 지식을 통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그냥 단순한 서양추수주의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삶을 나쁘게 끌고 가는 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천성을 해칠까봐 문명의 이기인 기계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노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그 이야기의 반만 알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반을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조용히 있었다.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얘긴즉슨 다음과 같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여행길에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그러자 자공이 힘겹게 일하는 그 모습이 딱해서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쓰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 있고 아주 편하니 그렇게 해 보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노인이 웃으면서 기계를 쓰면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서 순진 결백한 본래의 것이 없어지고, 그러면 또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도가 깃들지 않게 되니 기계를 안 쓰는 것이지 기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크게 느껴진 자공은 넋을 잃었다가 30리나 걷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자공은 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까? 문명의 착실한 건설을 주장하는 스승 공자와 전혀 다른 생각을 펼쳐 보이면서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철저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자공에게도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하고 나눈 대화를 보면 자공이 왜 그리 놀라고 또 감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색이 변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자공을 보고 그 제자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어서 그렇게 놀라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공이 말해준다. 자공은 원래 스승인 공자로부터 옳은 것을 하고 공을 이루려고 애쓰며 수고를 덜하고도 큰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배우고 그 가르침을 최고로 알았는데, 이 노인네는 확실히 근본의 도를 지키고 있어서 덕과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온전하니 확실히 공자보다도 훨씬 더 성인의 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경탄한 것이다. 자공이 머릿속에 그린 성인의 도는 일의 편리함이나 거짓 기교 따위로 자유롭고 소박한 원래의 마음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마음이 원치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돌아보지 않고, 모두가 비난해도 들은 체를 않는다. 성인의 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자공에게 기계가 주는 편리함을 누리다가 거짓 기교에 빠져 본마음을 잃지 않으려 하는 이 노인네의 모습은 자공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귀향 후에 공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 자공의 속마음에는 그 노인네를 스승보다 더 높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의할 점은 장자라는 책에는 ‘중언’(重言)이라는 기법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유명한 사람의 입을 통해 필자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권위에 기대 설득력을 배가시키려는 기술이다. 당연히 여기에 나오는 공자는 <논어> 속의 공자라기보다는 도가적 사상가로서의 공자다. 공자가 자공에게 그 노인네는 도가 정신을 잘못 배워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즉 자신의 내면만 다스리고 외면을 다스리는 법은 모른다고 일러준다. 참된 본성만 품고 무위자연의 순박한 모습을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속세적인 삶을 살면서도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보여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어야 최고지, 어느 한편만 지키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양자택일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한쪽만을 택해서 장자를 문명 부정론자로 끌고 간다. 이런 일은 노자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도덕경>에는 분명히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고 쓰여 있는데, 양자택일의 전사들은 ‘무위’만 보고 ‘무불위’는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사실 노자의 시선은 모든 일이 잘 이뤄지는 현실적인 효과로서의 ‘무불위’에 가 있다. 노자의 사상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물러서는 것도 앞서기 위해서다. <도덕경> 제7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성인후기신이신선’(聖人後其身而身先), 즉 뒤로 물러서지만 결국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을 지키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는 일만 챙기고,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는 일은 애써 외면한다. 노자나 장자나 모두 문명 부정론자가 아니다. 철저한 문명론자다. 다만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주장할 뿐이다. 문명 비판을 문명 부정으로 바로 끌고 갈 일이 아니다. 문명 비판이 문명 부정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초청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대립된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한쪽을 택한 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단이나 극단적 근본주의는 다 이런 곳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두 면을 동시에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이나 진보적 삶은 구현되지 못한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저것에만 빠지는 것은 부정의 고착화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이탈이다. 한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고, 경계에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쪽을 택하면 이념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한쪽을 택하면 얼굴에 짜증기가 새겨지고,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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