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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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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3-나의 이름은 청춘] 연극배우 허세직 씨

그땐 엇나갔어요, 연기 배우러
이젠 잘나가야죠, 멋진 배우로

  • 기사입력 : 2017-03-1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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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으면 꿈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은, 미안하지만 착각일 경우가 많다. 고도로 발달한 저성장 시대를 사는 요즘 젊은이 이야기다. 많은 젊은이들은 꿈 없이 산다. “꿈이 없었어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공부도 그저 그랬고,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엇나갔어요.” 허세직(31)씨는 엇나갔다. 학창시절 술담배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다. 하지만 연극을 하고 있는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정말 ‘엇나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꿈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자유롭게 꿈꿀 수도 없다. 그게 이 시대 20대·30대들의 흔한 자화상이다. “사실 진짜 엇나간 건 연기의 길에 들어서겠다는 마음을 품고부터였던 거 같아요.” 예술을 한다는 건 한국사회에서 그리 환영받을 만한 꿈은 아니다. 고생길이 뻔했다. ‘성공’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는 일보다 더 허무맹랑해 보였다. 부모님은 세직 씨의 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친구들이 힘을 실어줬다. 13년 전이었고, 그때만 해도 경남 일대에 연기학원이라 할 만한 곳은 마산에 딱 한 군데 있었다. “당시 한 달 학원비에 입학금도 따로 있어서 70~80만원 정도 들었어요. 친구들이 십시일반 용돈을 모아주고 저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뛰었어요. 주유원도 하고, 뷔페에서 접시도 나르면서 학원비를 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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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배우 허세직씨가 연극 ‘뷰티풀 라이프’를 공연했던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 아트팩토리 무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세직씨는 창원에서 나고 자랐다. 중소 도시에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흔하게 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쉬운 일이 아닌 그 일은, 고 2때 급작스럽게 일어났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을 보려고 했는데, 착오가 생겨서 잘못된 영상을 보게 됐어요.” 영화인 줄 알았던 파일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실황 공연이었고, 잘못 배달된 선물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감당하기 어려울 것들을 담고 있었다. “정말 충격 받았어요. 팬텀(Phantom) 역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거든요. 저게 뭐지? 나도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었어요. 그 강렬한 욕구가 저를 이까지 이끌고 왔다고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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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굴곡이 많다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건만 세직 씨의 스무살은 핑크빛이 아니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죠. 제 스스로 연기를 잘한다고 오만하게 굴었어요.” 자신만만하게 지망했던 대학을 모두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군대를 갔다. 상처가 컸다. 상처를 껴안는 것이 철드는 것이라 여겼다. 연기를 잊으려고 했다. 제대 이후 택배일을 시작했다. 1년 동안 머리를 비우고 이집저집으로 물건을 날랐다. “꿈을 버리니까 일정 부분 타협이 되는 거 같았어요. 부모님과도 사이가 좋아졌고, 사회생활에서 부딪혀 오는 저항도 없었어요.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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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특징은 굴곡이 많은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특성은 ‘싹을 잘라내기가 힘들다’는 것이 아닐까. 이후로 술만 마시면 이상한 주사가 생겼다. ‘연극 하고 싶다’는 말이 막 튀어나왔다. 엉엉 울기도 했다. “결국 다시 대입 준비를 했어요.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생활이 행복하지 않나 봐요.” 대학을 선택하면서, 평범한 직장인이 되길 바라는 부모님을 다시 한 번 거역했다. 상명대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다시 부모님과 멀어진 시기였고, 그 대가는 컸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3학년 때 ‘내가 무엇을 좇고 있는지’ 가족들에게 알릴 기회가 왔다. “학교에서 ‘노트르 담 드 파리’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어요. 전 프롤로 역을 맡았고, 부모님을 초청했죠. 커튼콜 할 때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쳤는데, 부모님이 환호하는 관중 속에서 어리둥절하게 서 계셨어요.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해요. 그날 저녁에 아버지께서 ’잘 봤다’ 한마디 하셨어요. 하지만 그 한마디 하시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지나오셨을지, 이제는 헤아릴 수 있어요.” 다음날 부모님은 세직 씨의 학자금을 모두 갚아주셨고,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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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배우 허세직씨의 다양한 표정들.


    이런저런 일을 겪고 13년을 달려왔다. 올해로 데뷔 4년차에 접어든다. 연극 4작품, 뮤지컬 3작품을 했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이게 맞나 싶다. “연극계에 제 나이대 배우들이 가장 많이 포진돼 있어요. 경쟁이 치열하기도 하고, 때문에 많이 그만두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오디션을 통해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런 경우는 아주 일부예요.” 게다가 오디션 기회는 서울 일부 지역에만 집중돼 있고, 리그 안에서도 이미 잘나가는 배우들은 따로 있었다. 그 속에서 주목받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매번 사춘기예요. 포기할까? 하는 유혹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죠. 작품을 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고, 안 하면 더 방법이 없는 느낌이거든요.” 웃으며 말하지만 사실 ‘사춘기’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황폐해지곤 한다. “친구들한테 내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 학원비를 줄 게 아니라 멱살을 잡고 말렸어야지 하고 면박 주고 그래요. 하하.” 하지만 정말 그만둘 생각은 없다.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꼭 해내고 싶은 게 있거든요.” 하정우, 조정석, 최민식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이들의 강점은 ‘유연함’에 있다고 말한다. 역할과 배우 자신이 구분이 안 되는 접점을 세직 씨도 찾고 싶다고 했다. “연기란 스스로 계속 나아가는 거예요, 혼자서. 한순간의 감정을 되새기는 작업을 철저하게, 끊임없이 하는 거예요.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울음이 터질 때 그 순간을 기억하려고 무진 애를 써요. 참 나쁘죠? 배우들끼리 우리 참 사악하다, 그래요. 하하.” 슬픔에 빠져 있는 연기를 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연기를 하고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최악이라고 했다. “내 안에 끌어올릴 슬픔이 없어서, 내가 우는 연기를 하고 있구나, 그걸 관객도 알아버렸구나, 이런 느낌이 들 때 정말 비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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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세직 씨는 창원 용호동의 아트팩토리 무대에서 자신의 연기 인생에 기념비라 할 만한 작품을 했다. 연극 ‘뷰티풀 라이프’(작 김원진·연출 이성호). 평범한 노부부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었고, 첫 지역공연인 창원 공연을 위한 오디션을 통해 세직 씨가 역할을 따냈다. 주연급 배역은 처음이었다. ‘박춘식’이라는 경상도 할아버지 역할이다 보니 노인이 가진 삶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 달 반 정도 매일 공원에 나가서 할아버지들을 관찰했어요. 걸음걸이나 말투 같은 것들요. 보통 드라마에서 보면 노년을 어눌하고 느린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죠. 대화 스타일만 봐도, 나이가 많을수록 더 감정적이고 격정적으로 빠르게 말해요. 그런 인위적인 것을 걷어내고 유연해지는 것. 그것이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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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뷰티풀 라이프’에서 열연 중인 허세직씨.


    더불어, 세직 씨는 자신처럼 ‘엇나간’ 친구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 창원에 연기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어요. 연기에 꿈을 가진 학생들을 제가 직접 무료로 가르치는 거죠. 보통은 어떤 직업을 갖기까지가 힘들잖아요. 시험도 치고 면접도 보고. 물론 직장생활도 힘들지만, 즉각적인 보상이 있잖아요. 월급이나 휴가, 승진 같은. 그런데 배우는요, ‘배우’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배를 곯기 시작해요. 고뇌하는 시간도 더 길어지고요. 그런 친구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싶어요.”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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