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장애인 달림이들의 벗’ 주재열씨

“달릴 수 없는 이들의 다리가 돼 세상을 함께 달려요”
휠체어 밀며 마라톤 참가

  • 기사입력 : 2016-11-24 22:00:00
  •   
  • 풀코스 50여회·울트라 60여회 등 완주
    경력 16년차인 ‘베테랑 마라토너’
    장애인 직원들과 야철마라톤 참가 계기
    뇌병변 직원 휠체어 밀며 7년째 레이스
     
    경기 불황으로 지난해 회사 폐업 어려움
    아내 도움으로 최근 마라톤화 다시 신어
    새 목표는 ‘아름다운 동행길’ 동호회 결성
    “더 많은 장애인들 휠체어 밀며 달릴 것”
    메인이미지
    주재열씨가 창원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김현철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전강용 기자/

    마라톤은 인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 종목으로 불린다. ‘완주쯤이야….’ 가벼운 발놀림으로 쾌조의 스타트를 하지만 10㎞, 20㎞를 지나 30㎞ 지점에 도달할 즈음이면 이내 온몸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팔다리는 묵직해진다.

    이때부터는 땅에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고통 그 자체다. 마음은 벌써 42.195㎞ 결승점을 통과했지만, 온몸에 있는 에너지를 쥐어짜내도 한 발 떼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서인지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대체로 30㎞ 지점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마라톤을 많이 접기도 한다.

    물론 포기를 모르는 마라토너들도 많다. ‘극한의 고통에 중독되어서’다. 온몸이 고통의 극한에 이르렀을 때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은 ‘모르핀’과도 같은 환각 물질을 방출한다고 하는데, 이 순간 달림이들은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극한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극강의 희열, 그들이 말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순간이다. ‘러너스 하이’를 맛본 뒤, 또는 맛보고자 이들은 한계에 몸을 맡긴다. 그들이 마라톤을 하는 목적이자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여기 “저는 좀 달라요”라고 말하는 마라토너도 있다. 42.195㎞ 풀코스만 50여 회, 한 번에 100㎞ 이상을 달리는 울트라마라톤 완주만 64번을 가뿐히 넘긴 16년차 베테랑 주재열(57·창원시 명서동)씨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주씨의 마라톤 목적은 장애인들에게 ‘세상을 구경시켜주기 위해서’다. 그가 7년여 전부터 전국 각지의 마라톤대회에 뇌병변으로 거동이 불편한 김현철(38)씨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러너스 하이’는 달리면서 경험하는 극한의 고통 뒤 찾아오는 몸의 희열이 아니다. 달리고 싶지만 달릴 수 없는 장애인들의 ‘다리’가 돼주는 것이다.

    그의 인생이 궁금했다. 달리기하듯 가쁜 숨을 내쉬며 그는 시간을 지난 2000년으로 돌려놓았다. 그해는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그가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어준 해였다. 그해 주씨는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운영을 시작해 10여 가지 모터부품을 제조해 대기업에 납품했다. 작업공정 가운데 단순 조립이 많았던 터라 그는 장애인종합복지관 팀장의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좀 달라’는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몫을 환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처음에는 1~2명이 찾아왔다가 이내 5명이 되고 점점 불어나 한창 잘나가던 2005년에는 장애인 31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했어요. 일 좀 시켜달라는 부탁을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 일거리가 없어도 손익계산을 하지 않고 일단은 취업을 다 시켜줬지요.”

    직원들을 가족같이 대한 그는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함께 산과 바다에도 놀러가고, 놀이공원도 다녔다. 그러던 중에 야철마라톤 5㎞ 코스에 걸을 수 있는 20여명의 장애인 직원들과 함께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행복해하는 직원들을 보며 그때 주씨는 훗날 거동이 불편한 이들도 꼭 데리고 나가리라 생각했다.

    2010년. 그에게는 특별한 해였다. 뇌병변으로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직원 현철씨와 함께 처음으로 마라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것. 그가 기억하는 가장 보람찬 순간이기도 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누구보다 밝고 쾌활한 현철이를 보자마자 ‘이 친구와 함께 뛰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주씨가 현철씨의 어깨를 주무르며 빙그레 웃었다. 이심전심. 현철씨도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메인이미지
    16년차 베테랑 마라토너인 주재열씨가 ‘해군과 함께 달리는 제9회 진해마라톤대회’에서 뇌병변으로 거동이 불편한 김현철씨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창원시 진해구 해군 영내를 달리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해 한 방송사가 주최한 전국일주마라톤대회에 그렇게 둘은 함께 나갔다. “장애인을 휠체어에 태워서 밀고 달리겠다는 사람을 처음 보고 주위에서는 얼마 못 달리고 금방 포기할 거라고 했지만 예상을 보기좋게 뒤엎고, 하루에 30㎞씩 일주일을 꼬박 달렸습니다”고 회상했다. “행복해 하는 현철이를 보며 오히려 제 인생이 더 행복해지는 순간을 맛봤지요.”

    달리는 순간처럼 늘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지만 인생에서도 버거운 순간은 때때로 찾아온다. 주씨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원청에서 몇 년째 부품 단가를 올려주지 않는 바람에 사업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2006년 이후부터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가족같은 직원들을 한두 명씩 내보내면서 운영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1년만 더 버텨야지’, ‘직원들 퇴직금 적립만 다 해놓으면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몇 년을 견뎠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지난해 폐업신고를 했다. 그렇게 버텼건만 퇴직한 직원들에게 지급할 퇴직금이 없어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셔서 하늘도 참 야속하기만 한 순간이었다. 자신이 너무 힘든 나머지 가족같이 지낸 직원들을 그는 그렇게 내보내고 4개월여 동안을 집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레이스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아내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세웠다. 주씨의 아내가 만약을 대비해 남겨놓은 보험과 적금을 모두 정리해 그에게 건넸다. 그 돈으로 빚을 정리하고 어렵사리 직원들의 퇴직금을 맞춰줄 수 있었다. “아내가 직원들은 우리를 믿고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이었으니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제 두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주씨는 그렇게 다시 출발선 앞에 섰다. 그는 최근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다시 마라톤화도 신었다.

    그에게 목표도 하나 생겼다. 곧 전국 각지의 마라토너들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길 마라톤 여행길’이라는 동호회를 만들 계획이다. 더 많이 달리고, 더 많은 장애인들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창원마라톤클럽, 58개띠마라톤클럽, 3·15마라톤클럽의 많은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달리기로 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더 많은 장애인들의 휠체어를 밀며 마라톤대회에 나서겠단다. 그의 단짝 현철씨와는 겨울에 열릴 춘천마라톤대회 풀코스를 목표로 연습에 한창이다.

    “장애인들이 세상 구경을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그들의 다리가 돼 보다 넓은 세상을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그게 제 ‘러너스 하이’입니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도영진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