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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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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성공한 사업가에서 고향 이장 변신한 심형욱 씨

“사소한 일상에서 오는 즐거움, 마음껏 누린답니다”

  • 기사입력 : 2015-11-2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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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의 척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공하면 다 행복한 것인가. 이 질문에 강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있다.

    20년 전 미지의 나라 라오스에 진출해 여러 분야의 사업에 손을 대 부를 일구고, 그 나라의 대통령과 장관 등 고위공직자와 연을 맺어 우리나라 민간외교에도 지평을 연 의령군 화정면 상정1구 이장 심형욱(50)씨.

    부와 명예를 양손에 쥐었으나 홀연히 5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마을 이장으로 변신한 심형욱씨는 현재 만 2년째 화정면 상정1구 이장을 맡아 마을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그는 아침 7시면 마을 뒷산에 오른다. 자신의 과수원에서 매일매일 스스로 할당한 작업에 구슬땀을 흘린다. 이장회의에도 참석해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찾는 마을 어르신들의 부름에도 어김없이 응해야 한다. 저녁에는 귀농인의 집에서 작목반 회원들과 둘러앉아 내일 할 일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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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군 화정면 상정1구 이장 심형욱씨가 독거노인 공동거주시설에서 어르신들과 냉이를 다듬고 있다.

    지난 11월 7일 오전, 심 이장은 귀농 귀촌인 예닐곱 명과 함께 의령군 가례면에 있는 경남사회진흥연수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재경 재부 의령군향우회 회원 150여명이 고향의 진산 자굴산을 등반하는 날이었으나 전국적으로 내린 비 때문에 등산을 취소하고 이곳에서 식사와 함께 유흥을 즐기기 위해 모였다.

    심 이장 일행은 이곳에서 첫 번째 농산물직거래 장터를 열었다. 귀농회원들은 직접 재배한 표고버섯, 마, 우엉, 상황버섯, 결명자, 콩, 은행 등을 상품으로 내놓았다. 판매량과 마진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경험이라는 소중한 이득을 얻었다.

    사실 그는 이제 3년차 농부일 뿐이다.

    투박한 외모나 땀으로 후줄근한 옷차림이야 영락없는 농부이지만 그것은 외양일 뿐, 농부로서의 내용은 빈약하고 내공은 한참 모자란다. 당연한 것이 그는 5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는 전혀 모르는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서울 광운대를 졸업한 그는 1993년 무역회사에 취직해 라오스로 건너가 2년 만에 퇴사한 후 직접 무역회사를 창업해 한약재를 수출하면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97년에는 13ha 규모의 농원을 매입한 데 이어 가방의 원료를 공급하는 피혁회사를 설립했고, 99년에는 골프장을 경영하기 위해 부지 128ha를 인수하기도 했다.

    2000년엔 대아장학회를 설립했다. 장학회 명칭은 그가 다닌 진주 대아고등학교에서 따왔다.

    사실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아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대아고를 포함해 2학년 때 인근 고등학교 3곳을 다니는 등 평탄하지 못한 학교생활 끝에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졸업했다.

    2002년에는 카지노를 오픈해 지금까지 대리인을 통해 운영 중이고, 2008년에는 대아여행사와 대아미디어를 창업하는 등 계열사를 계속 늘려 나갔다.

    그가 이렇게 승승장구한 것은 미지의 땅 라오스에 한국인으론 1세대로 진출한 데다 혁신적인 사고와 남다른 경영능력 덕분이지만, 그보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두루 경험하면서 길러진 오기와 인내가 당시의 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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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 이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불량서클에서 일탈을 거듭한 것이 결국 평탄한 길을 인생의 항로로 잡지 못한 단초가 됐습니다. 1년여 폭력세계와 유흥업소 웨이터까지 전전했고, 나중에는 회사가 부도나 노숙자까지 경험했으니까요”라고 토로했다.

    또 “현지 회사에 다니면서 라오스 국립대 라오스어반을 졸업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가장 중요한 언어문제를 해결하면서 사업에 자신감이 붙었지요. 2년 계약근로를 마치고 한약재 수출회사를 창립해 당시만 해도 반군들이 설쳐대던 산간벽지를 권총까지 차고 약재를 수거하러 다녔습니다”고 털어놨다.

    그는 라오스에서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1996년 한인회를 설립해 감사, 회장, 고문을 역임했고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라오스 정부의 표창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정부 고위관료와도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당시는 한국과 라오스와의 관계가 활발하지 못한 때여서 우리 정부 요인이나 외교사절 방문 시 그가 민간외교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글로벌 한국인’, ‘오지를 가다’, ‘메콩 프로젝트’ 등의 주제로 국내 TV와 신문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곤 했다.

    사업 확장과 성공 외에는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온 것은 5년 전.

    “어느 날부터 의욕이 상실되고 삶이 무기력해지면서 향수병이 도드라졌습니다. 감정 조절 불안에다 성공과 돈에 대한 허무감이 온몸을 휘감으면서 대인기피 등 종합적인 우울증 증세가 덮쳤던 거죠.”

    마침 고향의 어머니(79)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게 됐다.

    그때부터 1년 정도 귀국을 준비하면서 고향 의령에서 2~3개월씩 장기 체류를 시작해 어르신들을 모시고 시장과 병원 다니기를 소일거리 삼아 보내던 중 동네 어른들 권유로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장을 맡게 됐다.

    “마을 속사정을 알게 되니 많은 문제점이 보입디다. 소수에 의한 정보 독점과 이로 인한 기관의 보조 혜택이 균일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더라고요. 노동을 할 수 있는 젊은이가 거의 없는 것도 큰 문제였고, 빈집도 많았고 교통이 불편해 농산물 판매가 어려운 점도 농촌의 큰 문제였어요.”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르신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서로를 돌보는 독거노인 공동거주제는 의령군이 세계적으로 자랑해도 될 만한 특수시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고향에 정착해 첫 번째 시도한 것은 표고버섯 원목재배 작목반을 만든 것으로 20여명을 모집해 서로 의논하고 연구를 거듭하며 재배면적을 확대해 나갔다.

    다음은 도시민의 귀농귀촌에 앞장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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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형욱 이장이 표고버섯 원목재배시설에서 표고버섯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의령군농업기술센터의 협조로 귀농인의 집을 지원받아 빈집 3곳을 수리해 젊은 층을 전입시키고, 부산의 대형 병원과 연결해 주민 전체가 의료봉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부산에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개설하는 소득도 거두었다.

    그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진취적이다.

    “마을주민과 귀농 귀촌인들이 서로 화목하고 도움이 되는 마을, 정이 넘치고 모두가 잘사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소망입니다. 더불어 저 자신도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사소한 일상에서 오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무위자연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심 이장의 블로그를 일별하면 신선이 따로 없다. 옛적 선비가 낙향해 전원을 벗 삼아 밭이랑을 일구며 한편으로 풍류를 즐기듯 그의 삶도 유유자적하다.

    밤이 되니 겨울을 재촉하는 싸늘한 바람이 불고, 표고버섯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고 군불 넣은 뜨끈뜨끈한 방에 누워 TV를 본다.

    손닿는 곳에 도토리 떡과 홍시, 귤을 비롯 볶은 땅콩과 커피 담배도 있고, 상황버섯에 우엉을 넣은 물까지 먹을거리가 그득하다.

    자고 나면 내일 해야 할 일거리도 기다리고 있으니, 대장부 일상이 이만하면 뭐가 더 부러울까.

    마치 구름에 달 가듯이 막힘 없는 일상을 사는 그는 이제야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듯했다.

    글·사진=배성호 기자 baes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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