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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30여년간 민속품 모아온 주정분 씨

“민속품 모으면 지난 아픔 치유되는 것 같아요”

  • 기사입력 : 2015-07-2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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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을 갓 넘긴 때부터 민속품을 모으기 시작해 30여 년간 2만5000여 점의 민속품을 수집한 의령의 주정분(60)씨.

    의령 가례면에 소재한 정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은 마치 작은 민속박물관처럼 보였다.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마당과 거실 등에는 온갖 민속품이 널려 있었다.

    의령 가례면 괴진리 산 50에 위치한 주씨의 집은 서암저수지를 마주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주씨는 택호를 ‘서암지 위의 정자 같은 집’이라는 뜻에서 ‘서암정’이라고 지었다고 소개했다.

    이 집은 주씨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고향이 의령군 서암정 근처인 주씨는 1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서암정에 들어온 계기는 주씨가 민속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주씨는 의령에서 가난한 집안의 3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모두 사는 게 어려웠듯 주씨 역시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주씨는 한참 뒤 고등공민학교를 통해 학업을 계속 이어 갔지만 당시 6남매는 모두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수의사였는데 술을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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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품 수집가인 주정분씨가 지난 20일 오후 의령군 가례면 자택의 일선재에서 반닫이, 농 등 고가구를 배경으로 물레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전강용 기자/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아 어머니가 억척같이 일해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주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어려운 집안 형편이지만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했다. 큰아들을 고등학교까지 시키고, 공부를 잘했던 큰아들은 이후 공무원이 됐고 결혼도 했다. 주씨와 어머니는 큰오빠가 근무하던 부산으로 같이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불행이 닥쳤다. 어머니가 가장 의지하던 큰오빠는 1979년 산불방제 근무를 하고 와 숨졌다.

    큰오빠는 순직 처리됐지만 젊은 나이 청천벽력 같은 아들의 죽음에 어머니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등 세상을 포기한 듯이 보였다. 어머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할 수 없이 주씨는 곁에 두고 모시기로 하고 큰오빠 집에서 나와 함께 자취를 했다. 이때가 주씨가 20대 중반이던 시절이다.

    작은 수예점을 하던 주씨는 곁에 어머니를 두고 보살폈고, 어머니도 차츰 절망에서 회복했다. 그때부터 주씨는 민속품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많이 슬펐습니다. 슬픔이 민속품을 모으게 된 계기입니다.”

    주씨는 고향에 대한 향수, 어릴 때 힘들게 농사지으며 자식 공부시키던 엄마를 도와 일하던 기억 등을 떠올리며 민속품을 모았다고 했다. 그리고 민속품을 모으면 자신도 치유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모은 민속품(당시는 작은 소품들)을 라면박스에 모아 마루 밑이나 창고, 다락 등에 쌓아뒀다. 주씨는 당시로선 비교적 늦은 30살 때 결혼을 했다. 주씨는 소방공무원인 남편과의 만남으로 안정을 되찾고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주씨는 똑순이같이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결혼 이후 주씨는 민속품을 보다 본격적으로 모았다. 길을 가다 버려진 민속품이 있으면 집에 가져와 씻고 닦고 해서 한 점씩 수집했다. 제기, 작은 꽃접시, 차 넣는 통, 떡살, 동양매듭, 비녀 등…. 가리는 게 없이 오래된 것들은 모두 모았다. 또 욕심이 나는 민속품이 있으면 구입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이 모으면 놓아 둘 곳도 마땅찮을테고 부군께서 잔소리도 할 만한데 뭐라 안 하셨어요.”

    “남편은 공무원이라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니 집안 일에 간섭은 안 했어요. 또 처음부터 아파트가 아닌 개인주택에 살아서 창고 같은데 박스로 쌓아두면 잘 몰라요. 알면서도 내가 좋아하니 모른 척했겠죠. 고마운 분입니다.”

    그렇게 해서 30년 넘게 모은 민속품의 가짓수는 총 2만5000점. 개인 소장자 중에서는 국내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씨는 자랑했다.

    주씨가 소장한 민속품 중 품목별로 1000점이 넘는 것만 10종류 남짓 된다. 각종 항아리 3500점, 대나무 광주리 1000점, 다리미, 호미, 인두, 등잔, 호롱불 등 소품 1300점, 다듬잇방망이 1000점, 유기 숟가락, 대야, 그릇 등 3000점, 옛 사기그릇 5000점, 목수연장 1000점, 옛 LP판과 LP200점 등.

    이 외에도 옛날 옷, 베개, 자수, 해태포, 방석, 상보, 책상보, 양복걸이, 앞치마 500점, 연 얼레, 팽이치기 등 옛날 놀이기구 500점, 반짇고리, 은장도, 가락지, 비녀, 신패, 경대 등 500점, 사기요강 300점, 맷돌과 바가지 각 200점, 도리깨 호미 쟁기 가래 등 200점 등이 있다.

    주씨가 엄청난 민속품 수집가로 알려지면서 박물관이나 지자체 등에서 주씨를 초청해 민속품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주씨는 지난해 11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의령박물과 2층 특별전시실에서 ‘여인의 향기전’(주정분 개인 소장전)이란 이름으로 비녀, 가락지, 매듭, 떡살 등을 전시한 적이 있다.

    또 2008년 9월 20일부터 25일까지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옛날 그릇과 목기’ 전시회를 최명자씨와 함께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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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 많은 민속품을 지난 2006년 새로 자리를 잡은 의령 서암정에 옮겨왔다. 서암정을 만든 계기도 어머니와 관련이 있다. 어머니는 유언으로 “얼마 안되는 재산이지만 분배하지 말고 의좋게 형제 공동명의로 산을 구입해 나를 본 듯 찾아오라”고 해 괴정리 산을 샀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 이후 주씨 부부와 가족들은 서암지 저수지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주씨의 민속품을 보관했다.

    주씨는 “지금은 바빠 잘 정리를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전통가구와 물품 등을 이용한 다양한 테마 룸을 완공하고 싶다. 의령 사람들이 어디를 가서나 자랑할 수 있는 민속품 전시장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민속품에 무슨 매력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주씨는 “멋은 우리 옛날 것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고가의 외국 앤틱가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옛날 것과 비교가 안됩니다”고 답했다.

    “여기 있는 작은 접시, 어릴 적 촌에서 잔치할 때는 천지였는데 플라스틱 그릇이 나오면서 다 버리고 없어졌습니다. 장작가마로 만든 작은 접시들 얼마나 예쁩니까.”

    주씨는 투박하게 만든 접시, 나무로 만든 민속품에 살아 있는 나뭇결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마음의 여유도 있고 옛날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습니다.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 작은 전시회를 하고 싶고, 눈으로만 보는 전시회가 아닌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전시회를 해보고 싶고, 옛것을 보고 나누면서 아름답게 늙고 싶습니다.”

    이상규 기자 sk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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