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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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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신년리포트- 아침을 여는 사람들 (1) 농산물공판장 중도매인 체험기

1000분의 1초 마술…농산물 공판장 중도매인 체험기
주문같은 흥정 속, 1000분의 1초 뚫고 내 물건 ‘낙찰’

  • 기사입력 : 2015-01-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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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경 기자(오른쪽)가 방울토마토를 낙찰받기 위해 전광판을 응시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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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경매의 필수품인 ‘응찰기’. 희망가격을 입력해 경매사에게 전송한다./성승건 기자/


    올해로 창간 69주년을 맞는 경남신문이 오늘부터 조간으로 전환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소식을 보다 빠르게 전하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본지는 기자들이 직접 이른 아침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각종 직업인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그들의 건강한 노동을 매주 소개한다.



    “경남신문 조간 된다면서? 맞나?”

    불쏘시개를 들고 있던 노인이 불쑥 물었다. 젊은 아가씨가 여기는 왜 왔냐 묻기에, ‘경남신문 기자’라고 소개한 직후였다. 불 주위를 빙 둘러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기자의 얼굴을 향했다. 새벽 4시. 사방이 어두웠고 추위는 매서웠다. 요란한 소음을 내는 트럭 수십 대가 아슬아슬 길을 터놓고 있다. 경매가 끝나길 기다리는 소매상들이 모닥불 가까이 모여들었다. 호기롭게 공판장을 찾은 기자도, 수줍음을 버리고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자연 속 과실들이 ‘유통’이라는 문명화된 시스템을 타고 떠나는 긴 여정의 첫 관문. 그곳이 바로 공판장이다. 2014년의 마지막 날, 농협창원농산물공판장을 찾았다.

    “매일 이곳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 가격을 만들지요.” 하주헌 장장(場長)이 말했다. 그는 기자 앞에서 양손을 교차시켜 수요·공급 그래프를 만들어 보였다. 소싯적 경제학개론에서 배웠던 ‘수요·공급의 원리’가 철저하게 적용되는 품목이 농산물만 한 것이 있을까. 계절, 작황, 신선도에 따라 날마다 가격이 다른 소비재. 물론, 중앙도매시장인 가락농수산물도매시장 경매 낙찰가를 기준으로 오차범위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사과 한 알, 배추 한 포기도 동일한 값어치를 가진 것은 없다. 공산품과 달리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농산물의 시장원리’에 따라 지난 봄엔 양파가, 가을엔 감값이 폭락해 농민들의 애를 태웠다.

    농사와 경매에 대해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기자. 농협공판장 관리부서의 도움을 받아 한 중도매 점포를 찾아갔다.

    ‘9번’ 성용중(61)-박종분(57)씨 부부 가게. 농협공판장 소속 21명 과일 중도매인 중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부는 난롯가에 앉아 지난밤 있었던 송년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22번 술 잘 묵데!” “167번도 만만찮더라!” 아하. 중도매인들끼리는 숫자가 곧 이름이다. 부부는 잔뜩 긴장한 기자에게 말했다. “물건 먼저 봐두고, ‘얼마에 사겠다’ 생각한 뒤에 사면 되지! 어려븐 거 하나도 없다!”

    4시 30분. 기자는 부부를 따라 ‘물건’을 ‘찜’하러 갔다. 갖가지 과일들이 품목별로 공판장에 상자째 진열돼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과일을 꼼꼼히 따져보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물건을 살피던 박종분씨가 ‘이게 좋겠다’며 기자에게 방울토마토 하나를 건넸다. 먹어보라는 뜻이다. 좋은 과일을 고르는 기준을 알려 달랬더니 호쾌한 한마디로 끝내 버린다. “모양 좋고, 당도 높고!” ‘딱 보면 얼마에 낙찰받을 수 있겠다’는 감이 오냐는 기자의 우문에 그녀는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28년 공부했는데 그거 몰라 될 일이가!”

    경매에 앞서 전자경매의 필수품 ‘응찰기’ 사용법을 배웠다. 손짓으로 이뤄지던 수기경매가 전자경매로 넘어온 건 1999년의 일이다. 리모컨과 PDA를 합쳐 놓은 모양의 응찰기 화면엔 경매 중인 종목, 출하자 이름, 등급, 수량이 떴고 아래엔 희망가격을 입력할 수 있는 버튼이 있다. 염두에 둔 상품이 경매에 붙여지는 순간, 희망가를 응찰기에 찍어 ‘응찰’ 버튼을 누르면 경매사에게 그 값이 전송된다. 중도매인들이 보내온 값 중 가장 높은 값을 부른 사람에게, 다수가 같은 값이라면 가장 먼저 호가한 사람에게 낙찰된다. 희망가 전송 오차는 1000분의 1초. 21명의 중도매인들이 거의 동시에 버튼을 누른다는 이야기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5시 30분. 경매가 시작됐다. ‘딸랑딸랑~’ 경쾌한 종이 울리자, 모자를 쓴 경매사가 연단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경매는 감-토마토-방울토마토-딸기-참다래-멜론-수박-귤-배-포도 순으로 이뤄졌다. 먼저 보조경매사가 해당 상품의 박스를 열어 중도매인들에게 선을 보이고 출하자(出荷者) 이름과 물건의 등급, 수량을 소리 높여 부르자 경매사가 빠른 추임새로 흥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듣기에 따라 외국어 같기도 하고 도술을 부리는 주문 같다. 너무 빨라 귀로 알아들을 수 없으니 눈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기자는 연신 연단 위 전광판에 뜨는 품명-생산자-중량-등급-수량-경락단가-낙찰자 기록을 살폈다. 흡사 월스트리트 주식시장처럼 경매품목이 휙휙 넘어갔다. 보조경매사를 따라 중도매인들이 종종걸음 쳤다. 기자도 허둥지둥 뒤따랐다.

    특별히 신선한 물건, 믿을 만한 출하자의 상품이 불리면 중도매인들은 야릇한 눈빛을 교환하며 재빨리 응찰기를 눌렀다. 남들이 보지 못하게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린 채였다. 그들의 행동은 신속하고 침착했다. 평균 3초, 길면 7초. 한 품목이 팔려 나가는 찰나다.

    드디어 방울토마토 차례였다. 기자가 보는 앞에서 보조경매사가 토마토 상자를 뜯어 선을 보였다. 역시나 탐나는 물건답게 여러 사람들이 눈독을 들였다. 손에 진땀이 났다. 희망가를 입력해 재빨리 ‘응찰’ 버튼을 눌렀다. 전광판에 경락가 ‘7200원’, 낙찰자 ‘9’라는 표시가 떴다. 재빨리 상자에 ‘9’가 적힌 노란 스티커가 붙여졌다. 이제 ‘내 것’이 됐다는 의미다. 낙찰받은 물건은 지체할 겨를 없이 곧바로 옮겨졌다. 소매상들에게 넘길 것과 납품업체에 보낼 것을 분류해 트럭에 싣거나 점포로 옮길 차례. 성용중씨와 함께 낑낑대며 상자를 옮기고 있는데, 박씨가 다가와 속삭였다. “어제 8200원 했는데, 오늘 1000원이나 싸다. 잘 샀다!”



    ◆취재 후기

    도매시장은 한때 어마어마한 농산물 유통의 중심이었다. 시대가 변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직거래가 늘었다. 만나는 중도매인마다 ‘이 일은 전망이 밝지 않다’고 예측했다. 모닥불 앞에서 떨고 있던 기자에게 노인은 말했다. “내 오늘 시금치 사러 왔다. 요새가 제철이라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맛이 좋아지지. 아가씨도 살다 보믄 얼 때도 있고 녹을 때도 있을 끼다. 잘 견디 봐라. 가만히 견디면 다 되게 돼 있다.”

    그렇다. 시대가 변했다. 때문에 도매시장도 신문시장도 전망이 밝지 않다. 그러나 얼 때가 있으면 녹을 때도 있다. 노인은 말했다. “살기 힘들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아침 일찍 여기 와봐라. 다들 산다. 살고 있다.” 김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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