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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찰 이야기 < 9 > 창원 성주사

佛母山 곰의 신령함 깃든 ‘곰절’

  • 기사입력 : 2013-05-2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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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무형문화재 335호로 지정된석조 관음보살입상.
    대한불교 조계종 성주사 경내로 들어가는 33돌계단 끝 오른편에 돼지 석상이 불모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돼지 석상은 절을 노리는 뱀을 막는다는 설화를 담고 있다.
    법회가 열리는 설법전.
    불모루 아래에 있는 분수대 연못.


    도심 인근에 이만한 절이 또 있을까. 절은 도시민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찾기에 딱 적당한 정도의 크기이며, 옛 창원지역 어느 곳에서나 30분 안에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곰절’이라고 불리는 창원시 천선동에 있는 성주사(聖住寺·성인이 머무는 절)를 찾았다.

    절의 위치는 해발 801.7m인 불모산(佛母山) 서쪽 기슭에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성주사의 절터는 제비가 알을 품은 형상이며, 건너 산은 제비집을 노리는 뱀의 형세라고 한다. 그래서 한 쌍의 돌돼지를 입구에 배치해 두었다. 뱀은 돼지에게 기를 쓰지 못한다는 음양상 상극법칙을 활용한 것이다.

    절을 돌아보기 전에 원일 주지스님의 초대로 차 한 잔을 마셨다. 스님은 “이 절은 동물과 관련된 전설이 많은 곳이다. 들어오면서 봤겠지만 곰 돼지 코끼리 등 절에 사람보다 동물이 많다”며 웃음 지었다.

    성주사가 곰절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곰과 관련된 설화가 많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성주사에 불이 나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진경대사가 절을 중창하려고 옛 절터에 목재를 쌓아 두었는데 밤 사이 곰들이 지금의 절 자리로 목재를 옮겨 놓았다. 진경대사는 이를 부처님의 뜻으로 알고 목재가 옮겨진 자리에 절을 중창했으며, 그 뒤부터 사람들이 곰의 은혜를 기려 곰절이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곰 이야기. 불모산 자락에 재주 잘 부리는 곰이 살았다. 이 곰은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는 성주사에서 스님들의 수행정진에 심취해 자신도 스님인 양 법회 땐 스님들의 뒷자리에 앉기도 했다. 곰은 죽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성주사에 부목 일을 하게 되었다. 이 부목은 착하나 미련해 졸다 밥을 자주 태웠다. 어느 날 스님이 “이 곰 같은 놈아” 하고 지팡이로 등줄기를 후려쳤는데, 그날 이후 미련 곰탱이는 게으름을 뉘우치고 용맹정진해 마침내 큰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대웅전 벽화에 곰이 가마솥을 얹어 놓고 밥을 짓는 모습과 수행하는 모습이 있고, 안민터널 못미쳐 성주사로 갈리는 길에 있는 이정표에도 ‘곰절길’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 외에도 13세기와 17세기에 각각 성주사를 ‘웅신사(熊神寺)’로 불렀다는 역사적인 기록도 있으니, 설화든 역사든 분명 ‘곰의 신령함이 깃든 사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성주사 창건에 대해서도 두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하나는 장유화상 창건설(남방불교 전래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 때 무염국사 창건설(북방불교 전래설)이다.

    첫 번째 설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가락국을 세우고, 48년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이 사촌 오빠인 장유화상(허보옥)과 함께 가락국에 도착했다. 장유화상은 가락국 뒷산에 들어가 이 땅에 불법을 최초로 펼쳤으니 이 산을 불모산(佛母山:부처님의 어머니 산)이라 부르는 유래가 되었고, 김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난 아들 10명 중 7명이 모두 불모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두 번째 설은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 왜구가 병선을 이끌고 침범, 왕은 왜적을 격퇴할 방안을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왕의 꿈에 “지리산에 무염이란 스님이 있으니 그를 불러 문의하면 된다”고 해 곧 무염화상을 불렀다. 불모산에 도착한 무염화상은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세우고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쳤다. 그러자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면서 쇠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온 산을 뒤덮으니 이를 본 왜구들이 크게 놀라 달아났다. 이에 흥덕왕은 기뻐하며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내려주며 절을 창건토록 했다.

    성주사의 가람 배치는 대웅전이나 영산전처럼 조선시대에 지은 건물과 보타전, 명부전 등 낡은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안심료, 설법전과 같은 건물들이 서로 신구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또 대웅전 앞으로 고려 초기 삼층석탑, 진신사리 2과를 봉안한 백련지 옆 오층석탑과 같은 석물들이 가람의 구성을 더욱 짜임새 있게 한다.

    먼저 중심 전각인 대웅전은 외양이 고색창연해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은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 1655년에 처음 지었고, 1817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 옆에는 영산전이 있다. 부처님이 인도 영축산에서 많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법화경을 설법하던 광경을 영산회상이라고 하는데, 영산전은 이를 기리고 재현하기 위한 전각이다.

    성주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는 절마다 있는 일주문과 사천왕상 대신 33돌계단 끝 오른편에 두 마리 돼지 석상이 불모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절에 뱀이 많아 돼지 석상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앞서 설명한 대로 제비집 모양의 절터와 이를 노리는 뱀 형상의 앞산, 이를 보호하고자 상극인 돼지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절터는 화기(火氣)가 강한데 뱀은 화(火)를 뜻하고, 돼지는 수(水)를 뜻해 오행 원리상 물로 불을 제압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웅전 앞 해태 한 쌍과 절내 연못도 화기를 진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관음전. 성주사는 경남무형문화재 제335호로 지정된 석조 관음보살입상을 옮기기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지었으며, 2010년 6월 1일 관음전 상량식을 가졌다. 관음보살은 이름을 외우기만 해도 중생의 어려운 일을 구제해 준다고 한다. 관음보살상은 오랜 세월에 많이 깎였지만 얼굴은 온화한 느낌을 준다.

    글= 이상규 기자·사진= 전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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