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9) 남해 (끝)아직 식지 않은 100년 전 남해 독립 열기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8년 8월부터 경남의 독립만세운동을 조명해왔고 그 마지막이 남해다.
창원에서 취재차를 타고 남해대교에 다다랐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르는 바다는 바로 노량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곳.
이순신 장군은 이곳 노량 관음포에서 전사했다. 1598년 12월 16일이다. 음력으로는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치러졌던 야간 전투였다.
이웃 하동에서 타올랐던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바다 건너 남해로 닿았다. 당시에는 다리도 없었다. 1910년 4월 2일. 남해군 설천...차상호 기자 2020-04-21 21:19:11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8) 함양민초, 총검 앞 격렬한 만세운동… 불교 선사 독립운동 활발‘군중대열에서 뛰쳐나온 하승현은 일 헌병에 “검거한 우리 애국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윤영하가 분견소를 박차고 돌진하자 일군 헌병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해 왔다. 하승현은 쓰러져 즉사하고 윤영하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 흉보를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은 원수를 향해 맹호같이 육박해 갔다. 일 헌병은 다시 총포와 권총을 난사해 하재익은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졌으며, 하재연 또한 총포에 쓰러졌다. 부자(父子) 숙질(叔侄)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그 모양을 바라볼 때 그 누구가 민족...김재경 기자 2020-03-10 21:01:25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7) 거창총검도 막지 못한 장기리시장·위천장터 만세 함성거창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그날의 역사를 온전히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만세운동도 새롭게 고증돼 주목을 받는다. 거창으로 퍼진 독립운동 함성은 지금껏 우리가 알아온 것보다 더 컸다.
◇거창에 남은 곽종석 선생의 족적=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거창군 가북면 다전마을에 면우 곽종석 선생의 유허지를 복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생 후손들과 주민들이 그 당위성을 줄기차게 알려온 것이 결실을 봤다. 거창군은 “늦게나마 자체 사업 선정으로 자칫 잊힐 뻔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되살...김재경 기자 2020-02-11 21:05:04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6) 거제아주장터 ‘만세운동 불길’ 옥포까지 번졌다
거제 대우조선해양 정문 앞, 이곳은 거제의 첫 독립운동인 아주장터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이다. 100년 전엔 독립만세를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지만, 지금은 차디찬 아스팔트와 거대한 조선소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장터는 없어진 지 오래고,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흔적도 없다. 다만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100년이 넘게 ‘여기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조고운 기자 2020-01-15 07:58:28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⑮ 시위 규모 크고 격렬했던 합천일제 총검에도 꺾이지 않은 합천의 독립 열기2013년 11월 국가기록원은 ‘삼일운동 시 피살자 명부’를 공개했다. 1953년 우리 정부가 조사한 기록이다.
만세운동 때 일제에 의해 피살된 645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등재돼 있고, 합천 피살자는 4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삼가장터 21명, 초계 10명, 대양 9명 등이다. 주일한국대사관 창고에서 발견된 ‘3·1운동 피살자 명부’에 등재돼 있는 합천지역 피살자 명단에는 삼가장터가 21명으로 가장 많다.(2018년 11월 ‘합천군 3·1독립만세운동 학술대회’ 발표자료)
이처럼 합천의 독립만세운동은 그 어떤 지역보다 시위 규모가 ...차상호 기자 2019-12-17 21:02:27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⑭ 파리장서운동 출발지 산청파리 보낸 ‘독립청원서’ 산청 유림이 주도했다산청은 3·1운동 당시 면우 곽종석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장서를 보내 조국의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운동’의 출발지가 된 곳이자 유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다. 앞서선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손꼽히는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천재에 기거하며 영남 3대 의병장으로 불리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수많은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항일 독립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다.
...김재경 기자 2019-11-12 21:40:41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⑬ 치열한 독립운동 펼쳐진 통영독립운동 목숨 바친 청년·여성들 민중 일깨웠다“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19년 3월 통영, 스무두 살의 진평헌은 독립선언 격문 ‘동포에게 격하노라!’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경성(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에 내려와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독립선언문’을 구하지 못해 직접 쓰게 된 격문이었다.
격문은 13일 부도정시장(현 중앙시장)에서 계획된 만세시위에서 뿌려질 계획이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게 시위를 주도한 9명 전원이 체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통영의 만세시위는 이를 불씨로 불 붙기 시...조고운 기자 2019-10-31 21:02:32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⑫ 치열한 만세운동 전개된 고성거리 곳곳 울려퍼진 독립 함성 총칼도 막지 못했다기미년 3월부터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독립만세운동. 고성에서도 어느 곳 못지않게 거세게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고성에서는 100년 전 그해 3월 20일부터 수차례나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성내는 물론이고 상리, 회화, 대가, 영오까지 만세운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1971년 세워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3·1운동 창의탑./성승건 기자/
◇3월 17일= 비록 사...차상호 기자 2019-09-10 20:50:07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⑪ 호국의 성지 창녕군청년 결사단 23인, 이 다리서 맨주먹으로 총검 맞섰다창녕군은 많은 충신과 대학자를 배출한 고장이다. 창녕 사람은 예로부터 의와 예를 숭상하는 기질이 강해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뿐 아니라 항일 유림운동, 3·1독립만세운동 때 영산의 23인 결사단 등 많은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이 이 땅에서 고국을 지키고자 목숨 바쳐 투쟁했다. 호국의 성지 창녕군을 찾았다.
창녕의 독립운동은 주도한 23인 결사단이 일본 경찰과 맞서 싸운 창녕군 영산면 만년교./성승...김재경 기자 2019-08-13 20:49:12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⑩ 도내 최초 만세운동 일어난 함안만세운동 불길 ‘가장 먼저’·‘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곳‘이것은 본도에서 악성의 소요로서 그 정도도 전체로 보아 가장 심하였다.’ 일본군이 남긴 함안지역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함안군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9일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돼 4월 3일까지 34일간 11회 이상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20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다 목숨을 잃었고, 일본 군경의 피해도 군단위로 전국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치열했던 함안군을 찾았다.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조고운 기자 2019-07-09 21:17:29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⑨ 4·3 삼진의거마산 삼진(진전·진북·진동) 주민 수천명 독립 외친 ‘기미년 4대 의거’일제에 의해 이름마저 빼잇긴 그곳이었다. 진해군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삼진(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은 진해라고 불렸지만 일제에 의해 진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일제는 진해라는 이름을 해군기지가 건설된 웅천에다 가져다 붙였다. 러일전쟁을 대비해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 진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다시 삼진으로 돌아가보자. 진북면 지산리와 진동면 사동리를 잇는 사동교(지금의 지산교 자리). 100년 전 그해 기미년 4월 3일. 음력으로는 3월 3일이었다.
수천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일제의 근거지인 진동으로 향하...차상호 기자 2019-06-11 21:09:59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⑧ 충렬의 고장 양산1919년 3월 13일 양산서 동부경남 첫 독립함성 울려퍼졌다
양산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전’./김승권 기자/
양산시 물금읍에는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이 기념탑은 양산 출신으로 항일 독립투쟁에 헌신한 선열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9년 3월 1일 물금읍 디자인공원에 세워졌다. 높이 16.3m 주탑은 3·1독립만세운동과 농민운동, 의병 활동, 임시정부활동 및 학생운동 등 양산의 4대 항일독립운동을 상징하는 4개 탑신이 상부에서 하나로 합쳐지도록 해 두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는...김재경 기자 2019-04-30 22:00:00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⑦ 들불처럼 만세운동 일어난 김해1919년 3월 30일 밤 9시 김해 읍내장터 뜨거운 ‘독립 함성’
1919년 3월 30일, 김해읍내 장터의 공기는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장날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꾼들의 소란스러움 사이사이 은밀하고 민첩한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저무는 밤 9시 무렵,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떠난 빈 장터는 삼삼오오 몰려든 김해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이었을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소리쳤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각자의 품속에서 꺼낸 태극기들이 힘차게 흔들렸다. 김해 최초의 독립운동이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30일 ...조고운 기자 2019-04-09 22:00:00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들100년 전, 한반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몸을 던졌다. 그러나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1만5000여명. 당시 독립운동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이 때문에 아직도 내 할아버지, 내 할머니의 명예를 찾지 못한 후손들은 응어리진 한을 풀지 못한 채 지난 100년의 시간과 씨름하고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 공적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를 찾지 못하거나 망실해 속앓이만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사연을 들으면 안타깝다. 하지만 ...안대훈 기자 2019-03-03 22:00:00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⑥ 충의의 고장 의령장날 시작된 마세운동, 일주일간 의령 전역에 번지다
의령군 부림면을 찾은 날은 마침 신반장날이었다. 장터는 북적였다. 100년 전인 기미년(1919년) 3월 15일도 신반장날이었다.
그해 신반장은 인파로 가득 찼다. 하루 전인 3월 14일 의령읍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학은 신반으로 와 정주성에게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정주성은 최한규, 장용환, 황상환과 협의해 15일 신반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정오가 되자 장 복판에서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모인 이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10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차상호 기자 2019-03-03 22:00:00